昌寧 比斯伐伽倻의 成立과 發展
The Rising of Bisabol-Kaya in Changnyeong and it's development
저자
박현주
발행연도
2011 
학위수여기관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사항
사회과교육학과 역사교육 전공 2011. 2 
형태사항
III, 142 p. : 삽도, 지도 ; 26 cm. 
KDC
초록

삼한시대에 변진 24소국 중 ‘不斯國’이 위치하였던 지역인 昌寧은 문화가 융성할 수 있는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이런 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비사벌가야는 창녕지역에서 독특한 문화을 형성하였는데, 교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과 같은 거대한 고분군에 그 독자적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 중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창녕식 토기와 竪穴系 橫口式石室墓와 같은 독특한 墓制형식을 들 수 있다. 6세기 이후 한반도의 패권이 신라로 넘어가면서 비사벌가야 역시 신라에 복속되었다. 하지만, 창녕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방식은 군사적 거점과 감찰 구역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는 지배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된 명문 토기와 문헌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명문토기 중 ‘大干’은 신라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명칭으로 昌寧地域에서만 볼 수 있는 사료이다. 창녕비의 비문을 검토한 결과 이는 신라가 창녕지역을 복속하면서 지배층에게 준 述干이라는 직위와 관련 있으며, 이는 外位 중 上干에 위치하는 지위로 비사벌가야의 수장은 신라 복속 후 대외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또한 비사벌가야의 수장으로서 지위와 위상을 과시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된 지배자 칭호인 ‘干’보다 한 단계 높은 ‘大干’이라는 칭호로 명문토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명칭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유독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되는 것을 볼 때 계성고분군의 주체세력인 비사벌가야의 후예가 신라 복속이후에도 그 지위를 중앙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창녕의 비사벌가야는 비록 신라에 복속되었지만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신라로 부터 적어도 이 지역의 지배자에 대한 지위와 위상을 인정받으며, 이 지역을 관할했을 것이다. 이런 비사벌가야의 위상은 6세기경까지 계속되다가 점차 힘을 잃고 신라화 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日本書紀󰡕에서도 비사벌가야가 독자성을 갖고 대외적인 위상을 문화를 형성햇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료로 찾아보면, 神功紀, 49년에 ‘比自㶱(히시호)․南加羅․㖨國(도구노구니)․安羅(아라)․多羅(다라)․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라는 기록에서 比自㶱(히시호)는 창녕지역의 고대지명으로 비사벌가야를 지칭하는 것이다. 󰡔日本書紀󰡕에서도 7국 중 하나로 지칭함을 볼 때, 이시기 비사벌가야는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소국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창녕지역의 비사벌가야는 신라연맹체의 하나로 인식된 기존 연구와 달리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 발전시켜오다 신라화되어진 소국이라 추정한다.

목차

머 리 말1
Ⅰ. 伽倻 諸勢力의 登場과 창녕 比斯伐伽倻 6
1. 不斯國의 성립과 昌寧 6
1) 고대 昌寧지방의 역사지리적 성격 6
2) 不斯國의 성립 9
2. 比斯伐伽倻의 成立11
Ⅱ. 比斯伐伽倻의 成長과 新羅 歸屬 15
1. 比斯伐伽倻의 成長 15
1) 고분 자료로 본 比斯伐伽倻의 成長 15
2. 比斯伐伽倻의 해체와 新羅에의 歸屬 29
1) 新羅의 昌寧地域 進出 29
2) 新羅 支配下 昌寧 지역 33
맺음말40
참 고 문 헌 42
부 록 : 桂城古墳群 土器編年試案 46
ABSTRACT 47

소장기관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222001)

키워드
  • 역사교육
  • 비사벌 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