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世紀 百濟와 新羅의 ‘軍事協力體制’ 硏究
(A) study on the military cooperation system between Baekje and Silla in the 5th-6th century
저자
위가야
발행연도
2018 
학위수여기관
성균관대학교 
학위논문사항
사학과 2018. 8 
형태사항
60 p.; 26 cm. 
KDC
911.0359 4 
초록

본 연구는 5∼6세기 百濟와 新羅의 관계가 전개된 양상을 ‘군사협력체제’의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시기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동맹’의 관점에서 정리하였으나, 각자의 실리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던 5∼6세기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른 용어를 통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 상정한 ‘군사협력’이란 양국의 공동 군사행동뿐만 아니라 상호불가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상호불가침을 낮은 단계의(느슨한) 군사협력, 공동 군사행동을 높은 단계의(긴밀한) 군사협력으로 정의하였다. 5∼6세기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공동 군사작전을 수행한 것은 높은 단계의 군사협력이, 양국의 실리가 충돌함에 따라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서로 적대하며 군사적으로 충돌하지 않은 것은 낮은 단계의 군사협력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개념 설정을 바탕으로 백제·신라 관계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였다. 
 433년, 백제가 신라에 和親을 요청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군사협력체제’가 성립하였다. 다만 신라가 高句麗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낮은 단계의 군사협력이 이루어졌다. 455년,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을 받자 신라가 원군을 파견함으로써 높은 단계의 군사협력이 이루어졌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군사협력은 주로 고구려의 침입에 대한 공동방어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나, 백제의 對고구려 공세를 신라가 보조하는 전략도 운용되었음을 470∼474년, 신라가 백제의 외곽지역에 축성하여 고구려의 군사거점인 충주(國原)를 견제한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제가 신라가 고구려 공격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실리가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양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47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되는 일도 있었지만, 481년에는 백제·加耶·신라 연합군이 고구려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였고, 이후로도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는 등, 5세기말 백제와 신라는 군사협력을 통해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그 결과 전선은 진천-증평-괴산 선에서 고착되었다. 전선이 고착되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군사협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이간책을 구사하였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의 전략에 편승해 이중실리외교를 구사하여 국가의 내실을 강화하려 하였고, 백제가 이러한 신라의 태도를 경계함으로써 양국의 군사협력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백제는 武寧王 초기에 추진한 고구려와의 공방전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균열의 봉합을 시도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골칫거리였던 왜의 변경 침입 문제를 해결하고 양과의 교섭을 중개함으로써 균열을 봉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높은 단계의 군사협력을 재개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6세기 초 백제의 대외전략이 고구려 공격에서 가야지역 진출로 변화하였다. 백제는 己汶(남원)과 帶沙(하동)에 진출하였는데 목적은 섬진강 교통로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大加耶(伴跛·加羅: 고령)의 가야 제국에 대한 장악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대가야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백제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양국 사이의 분쟁을 국제무대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대가야의 의도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백제 또한 국제회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고 그 결과 섬진강 교통로 장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대가야는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通婚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한 양국의 ‘結黨’은 오래가지 못했다. 524년, 신라는 㖨己呑國(영산)을 공격하는 것으로 가야지역 진출을 시작하였고, 이에 반발한 卓淳國(창원)이 신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왜를 끌어들여 熊川국제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530년, 백제와 신라가 공모하여 탁순국을 공격하자 安羅(함안)가 이에 반발하여 안라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제회의의 결과는 탁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정해졌으며, 이로 인해 실리에 따라 우호와 갈등이 번갈아 나타나는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이용한 가야의 자구책이었던 국제회의는 한반도 남부에서 분쟁의 해결방식으로서 효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541년, 신라가 탁순국을 병합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차에 걸쳐 열린 사비국제회의에서는 백제와 가야 제국이 회의에 참여한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안라와 任那日本府의 고구려 통모가 실패하여 백제의 對가야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548년, 獨山城 전투에서 백제와 신라의 공동 방어작전이 수행됨으로써 양국의 군사협력이 다시 긴밀해졌다. 그 결과 551년, 백제는 신라·가야의 군대와 함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失地를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고구려와 ‘密約’을 맺고 한강유역을 침탈하였다. 백제는 이 시점에서 신라와의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그간의 노력을 포기했다. 백제는 기만책을 구사해 신라를 방심시킨 후 기습하여 신라를 제압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으나 554년, 管山城 전투에서 聖王이 전사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백제와 신라의 군사협력은 이렇게 파탄을 맞았다. 433년부터 120여 년간 이어져 온 ‘군사협력체제’의 종말이었다.

목차

서론 1
1. 연구의 목적과 선행연구 검토 1
2. 연구의 방법과 내용 14
Ⅰ. 한반도 정세의 변화와 ‘군사협력체제’의 성립 18
1. ‘군사협력체제’의 성립과 고구려의 대응 18
1) 백제와 신라의 ‘和親’과 ‘군사협력체제’의 성립 18
2) 고구려의 대응과 신라의 對고구려 종속 탈피 25
2. 백제의 대외전략 구상과 ‘군사협력체제’의 운용 전략 40
1) 백제의 고구려 포위전략 구상과 국제관계 40
2) 삼년산성의 축성과 백제·신라의 군사협력 전략 50
3. 고구려의 남진과 군사협력의 외연 확장 58
1) 백제의 對북위 교섭과 고구려의 한성 함락 58
2) 고구려의 신라 공격과 백제·신라·가야의 공동 방어 76
Ⅱ. 對고구려 전선의 고착과 ‘군사협력체제’의 동요 82
1. 對고구려 전선의 고착과 백제·신라 관계의 균열 82
1) 對고구려 전선의 고착과 고구려의 전략 변경 82
2) 신라의 이중실리외교와 백제의 對신라 경계 96
2. 백제의 정세변화와 균열의 봉합 시도 103
1) 무령왕의 즉위와 對고구려 공방전 103
2) 倭·梁과의 교섭 추진과 그 함의 110
3. 백제의 대외진출 정책 전환과 섬진강유역 진출 115
1) 對고구려전의 전황 변화와 대외진출 정책의 전환 115
2) ‘안라’ 5국회의의 전말과 백제의 섬진강유역 진출 120
Ⅲ. 백제와 신라의 실리 충돌과 ‘군사협력체제’의 종말 139
1. 한반도 남부의 정세 변동과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 139
1) 신라와 가라의 ‘結黨’과 백제의 대응 139
2)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과 안라국제회의 150
2. 사비국제회의 개최와 가야지역 정세의 변화 166
1) 1차 사비국제회의 개최의 배경과 백제의 대응 166
2) 2차 사비국제회의의 전말과 백제의 對가야 영향력 확대 173
3. 신라의 한강유역 침탈과 ‘군사협력체제’의 종말 191
1) 백제의 한강유역 수복과 신라의 한강유역 침탈 191
2) 백제·신라 관계의 파탄과 ‘군사협력체제’의 종말 199
결론 209
참고문헌 216
[ABSTRACT] 231

소장기관

강원대학교 도서관 (242002),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도서관 (241008),남서울대학교 도서관 (244021),단국대학교 퇴계기념도서관(중앙도서관) (211017),동국대학교 경주도서관 (247011),동아대학교 도서관 (221008),상지대학교 학술정보원 (242007),인제대학교 백인제기념도서관 (248012),충남대학교 도서관 (225009),한림대학교 도서관 (2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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