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동부지역 복합사회 형성과정의 고고학적 연구
An Archeological Study of the Formation of a Complex Society in Eastern Chonnam
저자
이동희
발행연도
2006 
학위수여기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사항
사학과 2006. 2 
형태사항
ⅵ, 79 p.(접지) : 삽도, 지도, 챠트 ; 26 cm 
KDC
911.0359 5  
초록

전남동부지역은 전남서부지역인 영산강 유역권과 비교하여 자연조건이 상이하다. 즉 영산강유역은 큰 산줄기가 없이 평야지대가 발달하였고, 인접 지역들이 상호 긴밀히 연결된다. 반면에 전남동부지역은 평야지대가 드물고, 산줄기에 의해 지역이 세분되어진다. 이러한 자연지형은 複合社會로의 轉換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는 전남동부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대상으로 위계화가 진전되기 시작하는 지석묘사회부터 국가단계인 백제에 편입되는 시점까지의 複合社會의 형성과 발전에 대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하였다. 複合社會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는 1960년대 이후 제시된 新進化論的인 사회발전단계모델을 援用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Ⅰ장에서는 지석묘 축조의 경제적 배경인 농경사회의 성립, 전남동부지역의 지석묘 편년, 단위지역(여수반도)에서의 지석묘사회의 분포와 권역․축조집단의 계층성․사회발전단계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남지방의 지석묘가 축조된 주된 시기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대로 보인다. 
 전남동부지역 가운데에서도 여수반도는 지리적으로 내륙지방과 구분되면서 지석묘가 밀집한 지역이다. 여수반도에서 발굴조사된 지석묘의 數․上石 무게․立地․副葬遺物 등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대개 지석묘의 수가 많아 집단이 크고 상석이 대형이며 입지가 곡간 평지나 구릉의 하단부에 자리잡은 집단이 부장유물이 풍부한 중심적인 집단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지석묘 사회의 발전단계에 대한 견해는 평등사회론과 계급사회론으로 양분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학설들을 비교 검토하면서 여수반도에 적용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는데, 결론적으로 지석묘사회는 單純族長社會에 진입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Ⅱ章에서는 전남동부지역에 있어서 鐵器文化의 流入에 따른 馬韓의 形成과 邑落․小國의 成長過程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전남지방의 철기시대의 上限은 기원전 2세기말로 추정되는데, 馬韓은 이러한 새로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남동부지역의 墓制와 住居址의 형식 등은,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와 동일하지 않다. 전남동부지역에서 서해안지역의 마한 묘제와 양상이 다른 것은 지석묘가 비교적 늦게까지 잔존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남동부지역에서 마한의 중심지와 지석묘의 밀집지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사회의 기본단위가 촌락이라면 마한사회에 와서는 邑落과 小國이 형성되고 있다. 
 전남동부지역에서 마한 소국으로 비정되는 곳은 득량만권, 순천만권, 보성강유역권 등으로 구분되어 자연지형별로 소국의 범위가 결정되어진다. 
 전남동부지역에 있어 馬韓의 小國은 구분되는 2가지 입지, 즉 해안가의 평야지대(낙안, 조성․득량)와 보성강유역권(복내 일대)으로 나누어진다. 해안에 인접한 소국이 내륙에 위치한 집단보다는 대외교역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아 좀 더 우월한 집단으로 성장한 듯하다. 
 전남동부지역은 4~5세기에 영산강유역이나 경남서부지역과 달리 독자적인 묘제나 토기문화가 성립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전남동부지역은 독자적인 지역연맹체를 형성할 만한 주체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여 5세기후반이후에 가야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발전단계상, 마한사회는 數萬에 달하는 인구수와 더불어 지역사회(村落) 위에 邑落과 國邑이라는 두 단계의 계층화가 보이기에 복합족장사회로 간주할 수 있다.
 Ⅲ章에서는 전남동부지역에서 5세기-6세기전반기에 빈출되는 가야계토기와 고분을 근거로 역사적 성격, 특히 후기가야연맹체와의 관련성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최근의 활발한 조사로 인하여 전남동부지역은 인접한 경남서부지역과 거의 동일하게 아라가야계, 소가야계, 대가야계 토기 뿐만 아니라 가야계 고총고분도 확인되고 있다. 
 4세기말에서 5세기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아라가야계 토기와 소가야계토기(前期)는 섬이나 해안, 강변에서 간헐적으로 출토된다. 아울러 생활유적에서 재지계토기와 공반되므로 일시적인 교류나 교역의 산물로 판단된다. 
 한편, 5세기 후반이후의 소가야계 토기(後期)는 출토 유적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분묘유적의 비율이 급증한다. 소가야계 묘제와 토기가 전남동부지역에 확산되는 후기에는 한시적으로 소가야연맹체에 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중심연대는 5세기후엽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로 보면 전남동부지역에서 대가야계 토기의 출현은 500년을 전후한 시점이라고 판단된다. 이 무렵에 전남동부지역은 대가야 토기와 고분이 출토되는 지역거점의 수장층이 고령의 대가야와 연맹관계를 맺은 대가야연맹체의 일부로 볼 수 있다. 
 5세기~6세기초엽의 전남동부지역사회는 가야와 연맹체관계에 있었다고 하지만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 집단이므로 복합족장사회에 머물러 있었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Ⅳ章에서는 6세기대 백제 영역화단계의 고고학적 양상을 살펴보고, 百濟郡縣의 설치와 土着勢力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전남동부지역은 그 지리적, 사회․경제적 요건으로 말미암아 복합족장사회에서 국가로의 자체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백제에 병합되었다. 백제의 영역화 시기는 문헌자료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근거해 보면 6세기 전반기로 볼 수 있다.
 전남동부지역에 비정되는 百濟 郡縣은 대개 4郡 14縣이며, 각 郡縣에는 관련된 百濟山城과 古墳群이 확인되고 있다. 
 全南東部地域 百濟 郡縣의 治所(百濟城)와 土着勢力의 中心地(國邑 혹은 邑落)와의 유기적인 관련성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경남서남부지방과 마찬가지로 전남동부지역에서 거점 首長層의 근거지에만 확인되는 대가야토기 출토지는 백제산성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대가야토기의 출토지점은 대개 국읍이나 읍락의 중심취락과 관련될 것이며, 이들 지점은 先史時代 이래 중요유물이나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계기적인 연속성을 가진다.

목차

目 次

序論 = 1
1. 自然地理的 環境과 考古學的 特徵 = 1
2. 硏究史 = 6
3. 硏究目的 및 硏究方法 = 23

Ⅰ. 支石墓社會의 形成과 發展 = 36
1. 農耕社會의 成立과 支石墓의 築造 = 36
2. 全南地域 支石墓의 檢討 = 39
3. 單位地域 支石墓社會 - 麗水半島 = 50
4. 社會의 性格 = 82

Ⅱ. 鐵器文化의 流入과 馬韓의 成長 = 107
1. 鐵器文化의 流入과 馬韓의 形成 = 107
2. 遺蹟과 遺物의 檢討 = 111
3. 全南東部地域의 特殊性 = 133
4. 馬韓小國과 社會의 性格 = 139

Ⅲ. 加耶文化의 影響 = 177
1. 加耶文化의 擴散背景 = 177
2. 關聯 遺蹟 및 遺物 = 179
3. 分類와 編年 = 186
4. 社會의 性格 = 207

Ⅳ. 百濟로의 編入 = 232
1. 百濟의 全南東部地域 進出時期 = 232
2. 遺蹟과 遺物의 檢討 = 233
3. 百濟郡縣의 設置와 土着勢力과의 關聯性 = 268

結論 = 281

【參考文獻】 = 299

【Abstract】 = 324

소장기관

동아대학교 도서관 (221008)